살림을 하다 보면 정말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장면이 하나 있다. 분명히 무를 사 오자마자 신문지나 키친타월로 정성껏 감싸 비닐에 넣어 꽁꽁 묶어 두었는데, 좀 지나서 꺼내보면 어김없이 비닐 안쪽에 물방울이 맺혀 있다. 그리고 잔뿌리 쪽이 축축하게 젖으면서 하얀 곰팡이가 슬슬 올라오기 시작한다.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다. 보관법이 틀린 건지 아니면 내 냉장고가 문제인 건지 짜증이 확 밀려오는 순간이다.

처음에는 내가 게을러서 보관을 대충 한 줄 알았다.
그런데 아니었다.
나름대로 신경을 쓰고 밀봉을 철저히 할수록 오히려 곰팡이는 더 신나서 피어오른다.
이게 아이러니한 게 무의 수분을 지키려고
비닐로 입구를 꽉 막는 행위 자체가
곰팡이에게는 최고의 환경을 만들어주는 꼴이 된다.
잔뿌리 쪽에 수시로 피는 하얀 곰팡이가 주는 경고

무는 냉장고 안에서도 계속 숨을 쉬며 수분을 내뿜는다.
키친타월이 그 수분을 어느 정도 받아내 주지만
한계가 오면 결국 비닐 안은 습기 가득한 온실처럼 변한다.
특히 조직이 약한 잔뿌리 쪽으로 물기가 고이는데
여기가 곰팡이들의 주 무대가 된다.
하얗게 핀 곰팡이를 보면 아깝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.
살살 닦아내거나 껍질만 두껍게 깎으면 속은 멀쩡해 보이기 때문이다.
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
나는 이 상태까지 온 무는 웬만하면 쓰지 않는다.
한두 번 아까워서 살려보겠다고 국을 끓여봤지만
단 한 번도 맛있던 적이 없다.
겉에 곰팡이가 보인다는 건
이미 무 전체의 맛이 가기 시작했다는 신호다.
썰어보면 속이 물탱크처럼 투명하게 변해 있거나
묘하게 퀴퀴한 냄새가 섞여 있다.
이런 무로 국을 끓이면 국물 맛이 밍밍하고
무 자체에서도 아무런 맛이 안 난다.
그래서 요즘은 하얀 곰팡이가 보이면 그냥 끝이다.
미련 없이 버리는 게 요리 전체를 망치지 않는 길이다.
하지만 주부 입장에서
무 하나를 통째로 버리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.
만약 곰팡이가 핀 부분이 아주 일부분이고
무 자체가 아직 단단하다면
최후의 수단은 있다.
단순히 겉면만 깎아내는 수준이 아니라
곰팡이가 핀 지점을 중심으로
최소 3cm 이상은 크게 잘라내고 써야 그나마 안전하다.
눈에 보이지 않는 곰팡이 포자가
이미 무 내부 깊숙이 침투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
아까워하지 말고
과감하게 쳐내야 한다.
그렇게 잘라냈는데도
속이 푸석하거나 냄새가 난다면
그때는 정말 미련 없이 휴지통으로 보내야 한다.
정 아까워서 어떻게든 활용하고 싶다면
직접 씹어 먹는 요리보다는
차라리 멸치나 다시마와 함께
육수를 내는 용도로만 사용하도록 한다.
육수를 진하게 낸 뒤
무는 건져서 버리면
그나마 무가 가진 시원한 맛이라도
마지막으로 뽑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.
딱 한 번 겪고 당황했던 까만 심지의 기억
무를 다루다 보면
곰팡이보다 더 당황스러운 상황을 만날 때가 있다.
겉면은 곰팡이 하나 없이 아주 깨끗한데
칼로 썰었더니
속에 까만 점이나 심지 같은 게 콕콕 박혀 있는 경우다.
나도 예전에 딱 한 번 이런 무를 만난 적이 있는데
처음에는 내부 깊숙이 곰팡이가 핀 줄 알고 육성으로 탄식이 나왔다.
그런데 냄새도 안 나고 주변 조직을 눌러봐도 아주 단단했다.
알고 보니
이건 곰팡이가 아니라
무 중심부 조직이 노화하면서 생기는 내부 갈변 현상이다.
냉장고 안에서 온도가 들쭉날쭉했거나
너무 오래 방치했을 때
무가 안에서부터 스스로 무너진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.
곰팡이가 외부에서 침입한 적이라면
까만 심지는 무가 속병을 앓은 셈이다.
이럴 때는 그 부분만 도려내고 먹을 수 있다고들 하지만
이것도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니다.
이미 단맛은 다 빠져나갔고
조직도 푸석해서
생으로 먹든 조리해서 먹든 맛이 예전 같지 않다.
주방에서 이런 무를 만났다면
이미 그 무의 전성기는 완전히 끝났다고 보는 게 맞다.
결국 수분 싸움에서 지지 않는 법
무 보관이 이토록 까다로운 이유는
결국 수분 관리 때문이다.
바람이 드는 걸 막으려면 꽉 닫아야 하고
곰팡이를 막으려면 통풍이 되어야 한다.
이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해야 하는데
이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.
그래서 나는 이제 무를 보관할 때
겉이 멀쩡한 지에만 집착하지 않는다.
비닐 안에 물기가 얼마나 찼는지
잔뿌리 쪽이 눅눅해지지는 않았는지를 수시로 확인한다.
살림이라는 게 그렇다.
아무리 잘하려고 애써도
재료가 내 맘 같지 않게 망가질 때가 많다.
하얗게 핀 곰팡이나
속에 박힌 까만 심지를 보며
아까워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,
먹을 수 있는 선과 버려야 할 선을 확실히 긋는 게
고수라고 생각한다.
어설프게 아끼려다
정성 들인 요리 전체의 풍미를 깎아먹는 것보다
확실하게 판단하고 정리하는 게 훨씬 합리적이다.
만약 조금이라도 곰팡이가 보인다면
과감하게 3cm 이상 잘라내고,
그래도 찝찝하다면 육수만 내고 버리는 과단성이 필요하다.
무 보관은 생각보다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지만
이런 실패들을 겪으면서 나만의 확실한 감이 생기는 법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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